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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도서사라져간 우리 한옥 시리즈

서울 옛 도시형 주택: 도시형 주택 최초·최후의 실측조사보고서

개인저자
이광노
서명/저자사항
서울 옛 도시형 주택 : 도시형 주택 최초·최후의 실측조사보고서 / 이광노 지음 ; 무애연구소 ; OB Seminar [현장조사]
판사항
개정판
발행사항
서울 : 곰시, 2012
형태사항
382 p. : 삽화 , 30 cm
ISBN
9788996741749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국토연구원EB038138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EB038138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국토연구원
책 소개
≪서울 옛 도시형 주택≫은 서울 지역 도시형 한옥마을과 달동네촌, 6·25전쟁 후 처음으로 지어진 아파트 등을 실측 조사한 보고서다. 이 책은 ‘사라져간 우리 한옥 시리즈’의 세번째 시리즈물로, 1편 ≪가회동≫, 2편 ≪파주·고성≫에 이어 개발연대의 도시형 주택을 조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서울 옛 도시형 주택≫은 1990년 9월 무애건축연구실이 펴낸 ≪도시형 한옥 조사보고서≫, 1988년 7월 ≪봉천·행당 도시주거 조사보고서≫, 1986년 7월 ≪행촌동 아파트·연립주택 조사보고서≫ 3권을 한 권으로 엮어 ≪서울 옛 도시형 주택≫으로 펴낸 것이다.
이 책은 도시형 한옥과 대한민국 최초의 공동주택(행촌동 아파트) 연구의 실측조사 자료일 뿐만 아니라,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봉천·행당동 달동네촌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아내 사회문화적 사료로서도 그 가치가 높다.

도시형 한옥은 전통한옥의 ‘매듭’이자 현대주택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보고서에 담긴 도시형 한옥과 달동네촌, 아파트는 개발연대 서울의 계층간 모순 담아


≪서울 옛 도시형 주택≫은 서울 지역 도시형 한옥마을의 조사보고서로, ‘사라져간 우리 한옥 시리즈’ 1편 ≪가회동≫, 2편 ≪파주·고성≫에 이은 3편이다. 이 책은 건축계의 원로 이광노 서울대 명예교수가 1990년 9월 펴낸 ≪도시형 한옥 조사보고서≫, 1988년 7월 ≪봉천·행당 도시주거 조사보고서≫, 1986년 7월 ≪행촌동 아파트·연립주택 조사보고서≫ 3권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은 도시형 한옥과 대한민국 최초의 공동주택(행촌동 아파트) 연구의 실측조사 자료일 뿐만 아니라,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봉천·행당동 달동네촌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아내 사회문화적 사료로서도 그 가치가 높다.

이광노 서울대 명예교수는 “도시형 한옥은 역사를 두고 지속돼 온 전통적인 한옥의 ‘매듭’이면서, 동시에 그것과 현대의 주거유형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면서 “도시형 한옥은 서울을 구성하는 특징적인 주거유형의 하나로, 특히 서울의 강북은 600년 시간의 흔적 위에, 그 중첩된 시간의 흔적들이 상처와 갈등으로 표현돼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도시형 한옥과 무허가 불량주택 그리고 아파트 등의 주거유형들은 서울이 갖고 있는 민족적 의미와 계층적 모순, 그리고 이 시대의 주거건축에 필연적인 보편적 주거 생산양식을 보여준다”면서 “현재 강북의 주거유형 가운데 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 도시형 한옥은 대부분 1930~1960년 사이에 지어진 속칭 ‘개량한옥’이나 ‘집장사집’들”이라고 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도시형 한옥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전의 전통적인 한옥이나 다른 주거유형과 구별된다. 첫째, 주거지 구조와 주거유형이 동시에 계획되고 건설된 주거유형이다. 둘째, 근대적인 주거지 구조와 전통적인 주거유형이 만남으로써 완성된 주거유형이다. 셋째, 집단적으로 건설된 주거유형으로, 동일한 주거유형의 복제 또는 변형에 의해 완성된 주거유형 및 주거지다.

무애건축연구소는 1986년 4월 서울 시내 도시의 한옥마을을 주로 택해 조사를 하면서, 우선 1956년 6·25 직후 건축된 한미재단의 시민주택을 조사했다. 그 다음으로 청계천 북쪽의 종로3가의 동묘 서편의 와룡·봉익·권농동 일대 한옥촌의 한옥들을 조사했고, 일제시대 말엽에 건축된 보문동 지구의 한옥들을 조사했다. 6·25 전쟁 이후 수복 직후 건축된 쌍문동 주택가의 신축 한옥들을 조사했었다.

특히 보문·용두동은 6·25 전쟁 직후 이른바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해 집장사들이 지은 한옥촌이다. 1986년 조사를 이끌었던 이광노 교수는 “깔끔한 한옥주택들이 바둑판처럼 들어선 것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생각이 난다”고 술회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와룡·봉익·권농·누상·누하동은 서울시 종로구 탑골(옛 파고다)공원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와룡동을 끼고 동묘(東廟) 서쪽으로 창덕궁(昌德宮·사적 122호)의 담장이 펼쳐진다. 가회동은 사대부(士大夫) 계급이 거주하는 전통적인 상류 주거지인데 비해, 누상·누하동은 서리(書吏) 등 하급관리의 전통적인 중류 주거지였고(서촌), 봉익동은 도심에 위치한 중인(中人) 계급의 주거지다.

1950년대 후반에 자생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행당지역과 1960년대 말 정부에 의해 집단 이주지역으로 선정됐던 봉천지역에 대한 조사도 진행했다. 당시 조사팀은 단순히 불량주택 조사라는 관점보다는 서울시의 중요한 주거유형에 대한 조사·연구라는 점에서 건축적 평가를 부여하고자 했다고 한다.

서울의 도심지 재개발에 의해 철거된 철거민들을 위해 서울시가 시영(市營) 난민주택으로 건설한 봉천동 산동네는 오늘날 상전벽해가 됐다. 28년 전(1988년 조사 때)을 추억할 수 있는 판자집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시퍼런 천막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동네 진입로에는 미대 학생들의 ‘월 페인팅’으로 단장이 돼 있었다.

독립문 옆 민둥산에 건설된 행촌동의 공동주택 단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계획에 의해 건설된 주거단지였다. 행촌동 연립주택은 6·25 전쟁 직후 추진된 공사로서 소규모지만 한국 정부가 직접 단지설계와 조경, 그리고 설비까지 한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였다.

우선 상수도를 공급하기 위해 언덕 위에 거대한 공동 수조를 만들었고, 각 주호(住戶)에 수도물을 공급했다. 각 주호의 화장실과 주방 기타에서 배출되는 각종 하수는 단지 아래쪽 평지에 집중식 배수조를 만들어 그곳에서 받아 정수처리해서 서울시 하수도로 연결시켰다.

이와 함께 행촌동 연립주택은 국내 처음으로 PS콘크리트(pre-stressed concrete) 보를 사용했다. 특히 행촌동 아파트는 광복 후 최초로 건축된 아파트로 수세식 변기를 갖춘 ‘현대식 주택’이라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기관의 하나였던 한미재단은 한국 최초로 조립식 구조로 된 공동주택을 공급하기로 하고, 경기도 안양에 P.S.콘크리트공장을 세우는 한편, 행촌동(杏村洞)에 1단계 시범주택사업을 시작했다. 초기 건설자금은 미국으로부터 원조받고, 다음에는 이를 유상으로 분양해 재원을 확보해 사업의 계속성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이러한 계획을 거부했다.

1956년 행촌동에 1단계 시범주택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이 대통령은 당시 밴 플리트(Van Fleet·1892~1992) 한미재단 총재(미8군 사령관 역임)와 미측 건축가 등을 경무대로 초청해 만찬을 대접했다. 이 자리에서 밴 플리트 사령관은 “시범주택을 일반에게 분양해 마련한 종자돈으로 주택사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나는 주택사업은 후생사업으로 생각하며, 그 때문에 정부부처도 주택은 건설부 산하가 아니라 사회부 산하에 있다”면서 “주택사업은 영리로 하면 안 된다, AK프로젝트는 이것으로 끝내고 대한주택영단(주공 전신)으로 넘기라”고 말했다.

결국 이 대통령의 뜻대로 무상 분양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대한주택영단으로 사업주체가 이관되는 바람에, 행촌동단지에 이은 주택단지 건설은 이뤄지지 않았다. 행촌동에 소재한 한미재단 시범주택은 당시의 미국의 기준에서 최소한의 주택규모를 산정해, 아파트와 연립주택의 형식으로 집 없는 서민들에게 보급해 주택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워낙 달리는 상황에서, 서민층에게 분양되는 경우보다는 중산층 이상에게 분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6·25 직후라 3층 아파트나 2층 연립주택 건설을 위해 철근 콘크리트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철근콘크리트 공법을 포기하고, 대신 시멘트 블록을 사용해 이중벽으로 중공(中空) 블록을 겹으로 쌓아 보강 벽체를 만들었다. 또 그 위에 PS보를 놓고, 1미터 간격으로 도무바닥 블록을 놓아 상부는 시멘트 모르타르를 1센티 두께로 발라 방바닥을 만들었다.

3층 아파트의 경우, 중앙난방식이었다. 따라서 끝집 지하실에 보일러실이 있어 그곳에서 나오는 온기(溫氣)를 각 아파트 주호 바닥 중공 블록 속으로 보내 온돌 난방을 했다. 아마도 우리나라 파이프식 온수난방의 시초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1957년 무렵, 미국 건축전문지 「아키텍처럴 레코드(Architectural Record)」는 행촌동 1단계 시범주택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한국에 모던한 서민주택이 건축됐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고 한다. 행촌동 주거단지는 당시 최신식 아파트와 연립주택 단지로 역사에 기록어야 할 것이다.

이광노 교수는 “이번에 간행하는 ≪서울 옛 도시형 주택≫을 통해 독자들은 대한민국 주택의 모습들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도시형 주택들에서 서민들의 애환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목차
개정판을 내며 서문 조사의 목적과 의미 조사의 개요 Q. 와룡·봉익·권농동 R. 용두동 S. 보문동 T. 누상·누하동 설문양식